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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독립을 위하여

[이덕일 역사TV] 북한산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 여운형 선생

by Gomuband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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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 골목으로 6년을 통학했으니

근처의 크고 작은 골목은 거의 다 훑고 다녔다고 봐도 된다.

걸레빵, 유쾌빵... 추억이 가득한 골목이다.

 

학교 바로 밑에는 김성수 선생 댁이 있었고

그 집 앞엔 항상 만년필 장수가 자전거 뒷자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있었지.

근처에 옛 건물이 많아서 교복 입은 애들이 그 건물 앞에 서 있으면

지금이 현대인지 일제강점기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계동 골목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틀어서 쭉 올라가면

비원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언덕을 넘어가면 왼쪽에 LG 회장댁의 큰 철문이 있었고

언덕 넘기 바로 전 오른쪽에 붉은 벽돌담이 있는 소박한 집이 있었다.

그 집이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님 댁이었다.

벽돌담이 갈라져 있었는데,

누가 말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게 폭탄 테러로 갈라진 거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큰 인물이신데 안타깝게 돌아가셨어.

 

그 집에 안내판을 달았다는 기사를 아래에 링크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22911.html

기사 원문 링크

 

오늘의 역사TV는

[이덕일의 현장답사] 북한산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 여운형 선생

좌파계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비운의 선각자 여운형 선생 묘소 답사

 

 

 

영상 밑에 몽양 선생님에 대한 글이 있어서 옮긴다.

 

여운형 선생 관련 중앙선데이 기고문 중

일제의 항복 소식에 식민지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독립운동가들, 특히 해외 인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8월 15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토로했다.

 

백범 김구는 불과 일주일 전인 8월 7일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

이범석(李範奭) 지대장 등과 미국의 OSS(전략정보국) 총책임자인 도너번 소장, OSS 중국 측 책임자인 홀레웰 대령 등과 작전회의를 하고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백범일지』)라고 선언했었다.

 

임정은 총지휘 이범석에게 전국을 3지구로 나눈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조직하게 했다. 안춘생(安椿生)이 대장(隊長)이었던 제1지구는 평안도반(반장 강정선), 황해도반(반장 송면수), 경기도반(반장 장준하)으로 구성했다.

노태준(盧泰俊)이 대장이었던 제2지구는 충청도반(반장 정일명), 전라도반(반장 박훈)으로, 노복선(盧福善)이 대장이었던 제3구는 함경도반(반장 김용주), 강원도반(반장 김준엽), 경상도반(반장 허영일)으로 구성했다(『독립운동사』6, 김준엽,『장정』).

 

각 반은 2~4개 조로 나누어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김구는 그 방법에 대해 “산동(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강원도반 반장이었던 장준하는 “통신장비와 무기와 식량과 휴대품을 갖추어 놓고, 일본 국민복과 일본 종이와 활자로 찍은 신분증을 가졌으며, 비용으로는 금괴(金塊)가 준비되어 있었다…국내 잠입준비는 완료되었고 출발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해로(海路)뿐만 아니라 비행기로도 낙하할 계획이었다. 국내정진군 본부요원으로서 지리산에 낙하할 계획이었던 이재현(李在賢)은 “만약 내렸다면 1개 사단 병력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라고 회고했다. 이재현은 ‘8월 9일 정도면 일본이 패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때는 모두들 자기가 가겠다고 야단이어서 제비를 뽑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임정 산하 광복군이 초모공작을 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칭 ‘천하무적’ 관동군이 허깨비처럼 저항 한 번 변변히 못해보고 무너진 데다 원자폭탄에 놀란 히로히토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항복하면서 국내 진공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김구는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만약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면 해방 후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김구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임정 의정원은 환국 후의 시국수습 방안 ‘14개조 원칙’을 김구 주석 명의로 발표하고 중국 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국내 치안 유지 문제 등을 임정에 맡기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임정 요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누가 먼저 귀국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해졌다. 임정의 OSS 대원들은 8월 18일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지만 일본군의 체류 거부로 다음날 산동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세월은 흘러갔다.

 

김구 일행이 중경에서 장개석과 부인 송미령(宋美齡)의 성대한 환송식을 받은 후 중국 비행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해방 후 거의 석 달이 지난 11월 5일이었다. 김구 일행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6000~7000여 명의 교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 김구를 수행했던 장준하는 ‘김구가 올랐던 단은 바로 그 자신이 윤봉길 의사를 시켜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던 그 자리’라면서 “정말 역사가 바뀌어 저 어른이 저 단에 서셨구나”라는 감회를 토로했다.

 

그러나 역사는 절반만 바뀌었던 것이어서 김구 일행의 귀국은 차일피일 미뤄져 11월 23일에야 미군의 C-47 중형수송기를 타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어쩌면 해방 후 귀국 때까지 석 달 여드레가 일제 36년보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있던 임정 주미 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은 10월 16일 이미 귀국해 있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김구보다 한 달 이상 빨리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반공주의자였던 맥아더의 후원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8월 27일 맥아더에게 ‘공동점령이나 신탁에는 반대한다’고 전제하면서도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군만의 단독점령을 환영합니다(『Syngman Rhee to MacArthur』)”라는 편지를 썼다. 미국이 김구와 이승만을 서로 다르게 대접했던 것처럼 소련도 김일성과 연안파(조선의용군)를 달리 대했다. 팔로군과 태항산맥을 누비며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을 기다리는 것은 소련군의 강제 무장해제였다.

 

김구 일행에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미국의 통보가 임정 요인들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했던 것처럼 소련군의 강제 무장해제 역시 조선의용군, 즉 연안파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했다. 박헌영은 8월 20일 서울 명륜동 김해군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이 작성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를 조선공산당의 잠정적인 정치노선으로 통과시키면서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이 역시 국내용일 뿐이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여운형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8월 15일 저녁 여운형·안재홍·이만규·이여성·이상백·정백·최근우 등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고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여운형은 8월 16일 하오 1시께 자신의 집 근처인 휘문중학교 교정으로 몰려든 5000여 군중에게 건준 결성 경과를 알렸다.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건국을 선포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미 군정장관 아널드는 10월 10일 “38도 이남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라면서 인공을 부인하고 미 군정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이승만의 관계는 소련과 김일성의 관계와 비슷했다. 목단강에 머물던 김일성은 다시 소련 영내로 들어가 소련군함 ‘푸카초프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9월 19일 원산에 상륙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의 후원으로 김구 일행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던 것처럼 김일성도 소련의 후원으로 해외 인사 누구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다. 남북을 점령한 두 강대국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유리한 정치 환경이 조성되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한국은 아직도 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새로운 시련이자 기회의 시작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중앙선데이 제314호 2013년 3월 17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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