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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진일기

20200501 - 휴업 68일째

by Gomuband 2020.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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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참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때가 두 번 있는데 5월과 10월이야.

가만히 앉아서 자연이 보여주는 걸 바라만 봐도 좋은 계절.

항상 이맘때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었어.

꿈이 이루어졌는데 별로 기쁘지 아니하니 별일이로세.

 

생님이요... 그건 텅텅 빈 곳간 때문이 아닌교?

재수 없어 새끼야! 저리 갓!

 

 

인생의 흑역사는 다시 생각하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법이지.

그래도 좀 개운하게 잊히도록 어른들로부터 정확한 이야기를 들어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쉬운 게 많아.

그 이야기란 게 당사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듣지 못하면

한쪽에 치우친 이야기가 되어버릴 게 뻔하니 아예 듣지 않았던 게 더 나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해.

펄벅의 '대지'를 읽으면서 '우리 집안 이야기와는 스케일이 다르지만 왕룽 집안도 대단하네...'라고 느꼈으니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겠어.

거기에 내가 또 반백년을 넘게 살았으니 후편을 쓸 정도의 이야기도 있지.

자서전은 어렵겠고 소설로 쓸 수는 있을 것 같아.

요건 71살 되면 시작하자.

 

 

불광동 이야기를 적다가 갑자기 떠오른 얼굴.

목사님 따님.

 

구파발로 가는 박석고개 못 미쳐 조흥은행이 있던 삼거리 건너편에

넓고 높은 계단이 있고 거길 다 올라서 오른쪽에 우리 집이 있었어.

시내에서 158번 버스 타고 오면 연신내 다음다음 정류장쯤 되겠다.

큰길을 가운데 두고 갈현동 불광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우리 집 쪽에는 신앙촌 박 장로가 세운 전도관, 진짜 군대 천막으로 된 개척 교회,

침례교회가 있었고

건너편 갈현동엔 장로교회가 많았지.

그중에서 제일 멋진 건물이 내가 죽어라 열심히 다니던 중앙교회였어.

선일 국민학교 오른쪽 언덕 위에 있었는데 빨간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었지.

 

그때는 일요일이나 교회에 행사가 있는 날은 빠짐없이 주일학교에 갔어.

사탕이나 과자, 작은 선물이 우릴 기쁘게 했기에

집안의 종교와 상관없이 그냥 다 같이 몰려다녔거든.

 

중앙교회 목사님은 예쁜 딸이 있었는데 나랑 동갑이었어.

천막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목사님 따님 보러 중앙교회도 나가기 시작했는데,

두 교회의 주일학교 시작 시간이 같아서 의리냐 사랑이냐 갈림길에서

꽤 고민했던 것 같아.

그래서 처음엔 두 교회를 번갈아 다니다가 나중에는 중앙교회만 열심히 다녔어.

역시 사랑의 힘이 위대하거든.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쫄딱 망해서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때 신세 지고 살던 집 누나는 취미가 코바늘 뜨기여서

항상 집안에 코바늘과 털실뭉치가 굴러다녔어.

심심할 때 나도 누나 옆에 앉아 일본 책 그림 보고 기본은 배워놓았었어.

 

그래서 목사님 따님에게 머리띠를 떠주기로 했지.

빨간색 털실로 뜨기 시작했는데

실을 당기는 힘이 고르지 않아서 자꾸 쪼글쪼글하게 떠지는 거야.

몇 번을 떴다 풀고 떴다 풀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다 뜨고 검정 고무줄까지 꿰매어 완성은 했는데

내가 봐도 참 초라하더라.

 

성탄예배 끝나면 선물을 나눠주시니까 우린 두 교회를 다 가기로 했어.

먼저 천막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다가 집에 일찍 가야 한다고 거짓말 치고

선물을 미리 챙겨 받은 다음 중앙교회로 냅다 뛰었지.

중앙교회 문을 살금살금 열고 기도하는 틈에 무사히 착석.

캐럴도 우렁차게 부르고 양말 모양 선물도 받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난 공책을 찢어서 곱게 싼 머리띠를 언제 줄 수 있을까만 생각했지.

드디어 마지막 기도 시간.

난 살금살금 내 사랑 옆으로 기어가서 무릎 위에 머리띠를 올려놓고 왔어.

원래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하며 멋있게 건네주려고 했는데...

 

다음 일요일, 주일학교 시간보다 조금 일찍 교회로 달려가서 옥상에 올라갔지.

거기서는 목사님 사택에서 나오는 게 다 보이거든.

과연 내가 준 머리띠를 하고 올까? 궁금했거든.

손이 꽁꽁 어는 것도 모르고 눈이 뚫어져라 그 애가 나오기만 기다렸다고.

 

내 사랑은 그 날 머리띠를 하고 왔을까?

쪼글쪼글한 빨간 머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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