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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Writing

추모소설 - 3. 청초선생

by Gomuband 201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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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세 편의 소설은...
제가 바랐던 그분의 소박한 모습을 상상하며 작년 6월에 쓴 글입니다.
지금은 온전하고 편안하게 웃고 계시기를 빌며
1주기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겠습니다.
당신이 계신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3. 청초 선생

  “청촌가?”
기정이의 굵은 목소리였다.
  “잠깐만...끊지 말게...”
나는 담뱃갑과 재떨이를 들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맨발에 닿은 댓돌이 서늘했다.
  “그래...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잠이 안 와서...”
  “늙은이가 일찍 자야지...별 일 없지?”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몇 박자가 지나도록 대답이 없었다.
  “기정이...”
  “전에 내가 물어봤던 거 있지.”
  “그래...내가 알려줬잖아.”
  “자네가 알려준 시(時)가 정말 정확한가?.”
  “그럼...본인이 말해준 건데.”
늦모기가 날아와 무릎에 앉았다.
귀뚜라미가 멈추었던 소리를 다시 이었다. 
  “만약 그 시(時)가 맞는다면 말년사주가 바뀌네.”
나는 모기를 날려 보내고 라이터를 켰다.
  “다 늙어서 사주가 바뀐들 별 일 있겠나?”
  “그런데 이번엔 좀 문제가 있어. 아주 크게 바뀐다네.
없던 관재수(官災手)가 생기고 살(殺)이 끼게 되지. 성운(星運)도 아주 나빠.
어제 점을 쳐보니 수호성(守護星)이 빛을 잃는다고 나왔네.”
  “수호성?”
  “응...사람을 지켜주는 별 말일세.”
수호성...정말 사람에게 수호성이 있을까?
내게도?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 수호성인은 익숙한 단어였지만 수호성이란 실체는 와 닿지 않았다.
. “열흘 전부터 수호성 옆에 다른 별이 보이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저녁 무렵 동쪽에 스몄던 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대화가 길어지자 나는 손을 뻗어 안방 문을 닫았다.
  “없던 별이 나타나는 일도 있나?”
  “큰 인물이 나거나 죽을 땐 별이 나타나기도 하고 스러지기도 하지.
자네가 믿는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나셨을 때도 별이 인도했잖아?“
  “그건 동방 박사 얘기지...”
  “별이 나타나고 없어지는 건 사실일세.
매일 새 별이 나타나고 헌 별이 사라진다네.
새로 나타나는 별은 또 하나의 우주가 시작됨을 알리지만,
그 별들은 옆에 있던 별의 운을 바꾼다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아주 좋지 않은 별이야. 협살성(協殺星)이라네.“
  “협살성?...협살성이 뭔가?”
  “같은 크기의 두 별이 나타나 원래 있던 별의 빛을 가리는 거지.
쌍살성(雙殺星)이라고도 하지. 삼국지에도 협살성의 기록이 있다네.
사마의는 제갈공명이 죽기 얼마 전부터 협살성을 보았다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말게. 큰 화를 당할지도 몰라.”
  “언제 자네가 내 말 믿은 적 있었나? 답답해서 하는 소릴세.”
  “내 조만간 한 번 내려갈게. 그 때 다시 얘기하지.”
  “그러게나...”
라이터 불빛에 재떨이 옆에 놓인 신문의 큰 글자가 살아났다.
  ‘검찰, 소환도 고려...“’



우린 일 년에 한 번씩 만났다.
미국에 사는 정길이와 일본에 사는 준기, 함양의 기정이 그리고 나.
별 인연이 없는 사회 친구들이었지만 사십 년이 가깝게 꾸준히 만났다.
재작년엔 서울에서 만나 함께 남산에 올랐었다.
팔각정 밑의 전망대에서 기정이가 말했다.
  “저 밑에 보이는 게 뭔지 알지?”
기정이의 손가락 끝엔 옛날 어린이회관 건물이 걸려있었다.
  “목여사가 지은 건물이잖아.”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할 거 하나도 없는데.”
  “잘 봐봐...자네 거랑 비슷하지 않아?”
  ”예끼 이 사람아!“
우린 그제야 기정이 말뜻을 알아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어린이회관 옆의 긴 계단으로 내려와 건너편 공원매점에 맥주를 한 캔씩 놓고 앉았다.
기정이가 건너편 어린이회관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시작했다.
  “저 건물의 윗부분은 남자 성기의 귀두와 많이 닮았어.
윗부분과 건물 높  이의 비례는 강건한 성인 남자의 것이라고 할 만하지.
건물 꼭대기의 디자인을 꼭 저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떻게들 생각해?”
  “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자네 요새 회춘하나보네.”
  “그러게...지리산 자락에서 산삼 먹고 살더니 머리도 까매지고...”
  “난 목여사가 아주 심오한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해.”
정길이가 오징어를 가늘게 찢어 땅콩에 말아 기정이에게 내밀었다.
  “목여사는 대통령의 여자들을 알고 있지 않았나?”
  “물론 알고 있었지. 저건 여자 때문에 생긴 건물이 아냐.”
  “그럼?”
  “남자들을 위해 만든 거야. 대통령과 그 아들을 위해...”
우린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의아해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목여사는 정씨 가문의 기를 보하려고 저 건물을 세운 거야. 건축 당시엔 아무도 몰랐겠지만...“
  “무슨 얘기야? 자세히 좀 설명해봐.”
기정이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내가 처음 지리산에 내려갔을 때 기억나지?”
  “그래, 절에서 안 받아준다고 욕을 바락바락 해댔지.”
준기가 맥주를 따서 기정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난 청학동 근처의 암자에 묵고 있었어. 목여사가 비운에 가시고 몇 달이  흘렀을 때지.
어느 날 쌍계사에서 큰 스님이 올라오셨어.
암자의 노스님 수발들던 상좌가 마을에 내려갔기에 내가 곡차를 준비하고 방에 불을 땠지.
스님들은 낮은 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셨지.
방과 부엌사이에 음식을 들이던 작은 창이 있었는데, 그 때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어.”
  “얘기소리가 들렸겠구나.”
  “그래...아주 놀라운 얘기를 들었어. 목여사 얘기였어.”
  “스님들이 목여사 얘기 할 게 뭐 있을까?”
  “가만히 좀 들어봐, 어느 날 목여사가 쌍계사에 오셔서 불공을 드리고 큰스님과 차를 드셨대.
얘기를 좀 나누다 주변 사람을 물려달라고 해서 상좌와 경호원까지 멀리 물리고 앉았더니
목여사가 상을 좀 봐달라고 하더래.”
  “상을? 관상을?”
  “그래, 관상.”
  “그 때 월남전이 한창이었지 아마? 대통령 아들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였을 테고.”
  “그렇지. 3선개헌 통과로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웠긴 했지만 달러가 막 들어올 때였잖아.”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목여사가 자기 운명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관상을 봐달라고 하곤
대통령과 아들, 딸 걱정을 하시더라는 거야.”
  “그래서?”
모두 침을 삼키며 듣고 있는데 정길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야야...배고프다. 어디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듣자.”

우린 남산케이블카 옆으로 걸어 내려와 명동의 금성섞어찌게집으로 갔다.
주인 할머니가 정길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덥석 잡아 주셨다.
정길이는 오징어섞어찌게를 정말 좋아했다.
한국은행 옆과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추송웅 씨의 카페 밑에도 섞어찌개집이 있었지만
정길이는 꼭 코스모스백화점 뒤에 있는 금성섞어찌개집에 와서 먹곤 했다.
양념이 다르다나?...
방 한 켠에 자리하고 오징어젓을 안주 삼아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역시 한국 소주가 최고야! 자...이제 다시 보따리를 풀어보시지.”
  “그래...큰스님께서는 간단하게 ‘여사님에게서는 외로운 학이 보일 뿐 입니 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하더라고. 그랬더니 목여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다가 대통령 가족이 편안할 방도가 있겠냐고 다시 물으시더래. 그래서 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청와대가 풍수적으로는 명당이지만, 터가    세서 예로부터 그 안에 든 사람은 양기가 부족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어려운 일이 많으니 대통령과 아드님의 양기를 살리고, 기가 센 따님들을 누르려면 청와대 반대편에 양기를 상징하는 지세가 필요하다고 답하셨다는 거야.”
  “청와대 반대편이라면 남산이잖아?”
  “그렇지...그 때 남산타워가 없었나?”
  “그땐 남산 팔각정이 제일 높았어.”
섞어찌개가 맛있게 끓는 소리를 내고 있었기에 우동사리를 넣고 불을 낮췄다.
  “그래서?”
  “한참 지나서 큰스님이 서울에 와보니 남산에 허연 건물이 하나 새로 생겼더래. 멀리 조계사에서 바라보니 건물 꼭대기 모양이 영 이상해서 상좌랑 같이 남대문 옆까지 와보고서야 무릎을 탁 치셨다는 거야. 그래서 상좌에게 ‘저 건물이 무엇으로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대. 상좌는 새로 지은 어린이회관으로 보인다고 답을 하더래. 그래서 큰스님은 껄껄 웃고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셨대.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청와대가 직선거리로 보이는 곳에 우뚝하게 잘 지은 어린이회관이 바로 서있더라는 거야.”
  “하하하...기정이 니가 지어낸 거지?”
  “어쩐지 처음부터 좀 이상 하더라. 귀두가 어떠니 저떠니하는 폼이...”
  “거짓말 아니래도...”
  “알았어, 알았어, 술이나 마시자 국물 다 졸겠다.”
  
권도원 박사의 팔체질 이론에 따른 새로운 침의 세계를 연구한 게 벌써 40년...한의사 인생 절반을 투자한 정말 고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젊음을 바친 공부가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는 것을 보면 내가 꿈꾸었던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실현되는 것 같아 보람이 가득하기도 했다.
영주는 내가 서울의 팔체질침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알게 된 친구였다.
세미나 쉬는 시간에 연주한 기타음악이 맘에 들어 가끔 광주로 초대해 음악회를 열어주곤 했다.
영주는 기타치고 음악 만드는 게 직업이었지만 민간요법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겠다며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내려오기도 했다.
영주는 가끔 엉뚱한 아이디어도 가지고 왔다.
체질판별을 위해 몸에 흐르는 전류를 측정하는 기계를 도입하자고 하거나, 물속에서 무중력 상태로 체질판별을 하자는...
가끔 영주 같은 전통의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 주는 것도 내게는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잠시나마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영주 때문이었다.



오 년 전이었다.
영주가 금요일 저녁에 함평으로 낚시를 가는데 함께 가실 수 있으시냐고 전화를 했다.
난 주말 내내 성당의 순회 진료봉사가 잡혀 있었기에 동행할 수 없어서 올라가는 길에 들리라고 하고 해남으로 갔다.
봉사를 마치고 늦은 저녁을 하고 돌아오니 몸은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난 기쁨에 잠이 오지 않았다.
기분 좋을 때마다 꺼내 듣는 왈츠곡 레코드판에 바늘을 얹었다.
잠을 청하러 들어가는 집사람을 잡고 마루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우리 부부는 가끔 잠옷 입고 심야에 춤을 춘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대신 작은 재미를 함께 나누며 평생을 살았기에 평생을 신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간다.
‘비엔나 숲 속의 왈츠‘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영줍니다.”
  “허허...그래...고기는 좀 나와?”
  “네...재미 좀 봤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부탁드릴 일이 생겼습니다.”
  “이 밤에 무슨 부탁? 소주가 떨어졌나?”
  “그게 아니고요. 다친 분이 계세요. 발목을 심하게 삐셨어요.”
  “아아 ~거기가 어딘데? 내가 택시 타고 갈까?”
  “불갑사 부근인데요. 나오지 마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댁으로 지금 모시고 가도 될까요?”
  “빨리 모시고 오게.”

대문 앞에 차가 급하게 서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열려 있어요...”
영주 뒤를 따라 키 큰 낚시꾼이 키 작은 낚시꾼을 부축하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반백의 낚시꾼이 짐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어서 안으로 모시게.”
  “늦은 밤에 실례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조심하세요. 다친 발 딛지 마시고요.”
키 작은 낚시꾼이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삔 곳은 종래의 침법으로도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팔체질침을 쓰려면
체질판별을 먼저 해야 했다.   
  “잠깐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체질판별을 해야 하거든요.”
  “그럼요, 여자분들은 아기를 낳는 고통도 참는데 이 정도를 못 참겠습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키 작은 낚시꾼의 목소리는 귀에 익은 소리였다.
내 고향 말투와 비슷했지만 조금 다른...
어디서 들었을까?...
  “잠바를 벗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쇠붙이나 시계도 풀러 주시고요.
아! 모자도 벗으시지요.”
키 작은 낚시꾼이 모자를 벗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키 큰 낚시꾼도 모자를 벗었다.
  “정영택이라고 합니다. 영주 친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백의 낚시꾼도 모자를 벗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초 선생님. 실례가 많습니다.”
영주는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내 눈앞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앉아 계셨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아닙니다. 김군...미리 기별을 하고 오지...”
영주는 계속 웃고 있었다.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선생을 놀라게 해?’
  “잠깐만요...뭘 좀 드셔야지요,..”
  “아 ~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 야식거리도 다 가져왔어요. 괜찮아요.”
  “그래도...그게 아니지...요.”
안방으로 건너가 아내를 깨웠다.
낮에 많이 피곤했는지 그새 코를 골며 잠들어있었다.
  “여보 잠깐 일어나 봐...응?”
몇 번 흔들어도 영 일어날 기색이 없다.
  “선생님...”
영주가 목소리를 낮춰 날 불렀다.
  “저흰 아까 식사 다 했고요. 시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차 준비할게요.
선생님께선 치료 먼저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그러자꾸나,”

체질판별을 했다.
목음인(木陰人)이었다.
  “침을 놓을 때마다 이 절차가 필요한가요?”
  “위급할 땐 그냥 놓을 수도 있지만 체질판별을 한 후에 놓는 게 정확합니다,”
  “그렇군요. 양말을 벗을까요?”
  “네. 이쪽으로 편히 누우십시오.”
  “발을 삐었는데 팔에도 침을 놓습니까?”
반백의 낚시꾼이 물었다.
  “네, 팔체질침은 팔과 다리의 혈에 놓습니다.”
내가 침을 놓기 시작하자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아! 아픈 곳에 놓는 침이 아니군요. 처음 맞아봅니다.”
  “네, 팔체질침은 조금 다른 방법을 쓰는 침법입니다.”
  “말씀 낮추시지요. 청초 선생님. 저보다 연세가 높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씀 낮추세요."
  “그래도 어떻게...”
  “괜찮습니다. 선생님께선 저희의 인생 선배님이시지 않습니까?” 
시술이 끝났다.
  “이제 좀 누워계시면 통증이 가실 것입니다. 편히 누우세요.”
환자는 자리에 눕고 모두 편하게 둘러앉았다.
영주가 차를 내왔다.
  “좋은 침술을 공부하셨는데...요새 한의학계가 어려움이 많으시죠?”
  “하하...제 개인의 이익을 보려고 공부한 게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전통의학을 지키시는 분들은 힘드신 게 많으실 겁니다.”
  “이미 오래된 일이지요.”
법 공부를 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미안한 얼굴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은 괜히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복귀하면 힘을 좀 써볼까요?”
  “아...아닙니다,,,요샌 여러 사람이 우리 의학의 우수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사람을 위한 인술도 영역가름이 치열하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생님, 이거 노 선생님 생년월일시를 적은 건데요. 함양의 이 선생님께  좀 봐주십사 부탁해도 될까요? 선생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죄송하지만, 요새 상황이 하도 답답해서 제가 고집을 좀 피웠습니다.”
영주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음력 1946년 8월 6일 辰時”
영주도 요새 돌아가는 상황에 어지간히 숨이 막혔나 보다.
오죽 답답하면 노 선생의 사주를 다 풀어보고 싶었을까?
  “그러지, 내가 이 선생께 전해줄게. 그런데 어쩌다 발목을 다치셨나?”
  “원래 오늘 낚시는 영택이와 둘이만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중간에 문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지금 무안에 내려와 있는데 시간 나면 놀러오라고...”
  “그랬구먼.”
  “그래서 제가 함평에 낚시하러 가는 중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두 분이 낚시터까지 찾아오셨답니다. 저희가 자리 잡은 데가 좀 험했거든요. 어두운데 물가로 내려오시다가 발을 헛디디셔서...”
  “큰일 날 뻔 했군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으면 종종 발목을 삐지요. 노 선생께서 요새 생각이 많으셨나 봅니다. 금방 나을 수 있으니 편히 쉬십시오.”



노 선생께 얇은 이불을 덮어드리고 우린 마루로 나와 앉았다.
영주가 막걸리와 열무김치를 소반에 담아 내왔다.
  “헌재에서 소식이 없었나요?”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너무 걱정 마시고 한 잔 드십시다.”
  “청초 선생님 약주 못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손님들이 오셨는데 어찌 한 잔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한 잔 주시지요. 안 주시면 청초선생님도 탄핵하렵니다.”
노 선생께서 문을 빼꼼히 열고 부러 삐친 얼굴을 했다.
  “허허...아직 불편 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노 선생이 아픈 다리를 살살 끌며 마루로 나왔다.
영주가 담요를 가지고 나와 넓게 깔았다.
  “통증이 많이 가셨습니다. 역시 우리 의술이 최고군요.”
  “저도 탄핵 당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요...허허허.”
  “그러셨군요...요새 모든 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농담들 하신다면서요. 잘 된 건 내 재주요, 못 된 건 노무현 탓이라고요,”
  “천주교회엔 ‘내 탓이오, 내 탓이오’란 말이 있지요.”
  “저도 차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았지요. 모든 게 다 내 탓으로 돌리고 겸허히 세상을 산다면 좋은 사회가 되겠지요.”
  “자! 한 잔씩 하시지요. 청초 선생님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남자들의 우렁찬 건배 소리에 아내가 잠을 깨고 마루로 나왔다.
  “여보...늦었는데...”
  “아! 당신 깨었구료. 손님들이 오셨소.”
  “안녕하세요 사모님. 밤 늦게 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영주씨 오셨네요. 낚시 간다더니...”
  “네, 낚시 갔다가 바로 왔습니다. 제가 열무김치 좀 꺼냈습니다.”
  “아유...얼마든지 드세요. 손님들 저녁은 하셨는지...”
  “식사는 다 하셨다네요. 당신 막걸리 한 잔 하시려오?”
  “이리 앉으시지요. 늦게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반백의 낚시꾼이 일어나며 아내에게 합석을 권했다.
  “아유, 아닙니다. 저 술 못합니다. 편하게 드세요. 냉장고에 과일도 없을 텐데.”
아내가 카디건을 여미며 부엌으로 갔다.
  “두 분이 많이 닮으셨습니다.”
  “하하...그렇습니까? 오래 같이 살다보니 서로 닮는 것 같더군요.”
  “우리 부부는 서로 안 닮기로 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닮는 건 좋은데, 아내가 저를 닮는 것은 싫다고 합니다.”
모두 마루가 떠나가게 커다랗게 웃었다.

노 선생은 타고난 장난꾸러기 같았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가난은 사람을 찌들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가난은 불편할 뿐이야.’
  ‘농담 좋아하는 저 천진난만한 얼굴이 어떻게 험한 정치판을 헤쳐 왔을까?’
아내가 가늘게 찢은 장조림과 생두부를 접시에 담아왔다.
  “편하게 드시고 푹 쉬세요 아침에 두부찌게 끓여드릴게요.”
  “사모님 제가 붕어 잡아 왔어요”
  “그럼 매운탕을 끓여야겠네요. 그런데 두 선생님은 어디서 많이 뵌 분들이시네요.”
아내는 잠결에 안경을 쓰고 나오지 않아 손님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아! 여보 이 분은...”
  “네...저희들 탤런트입니다. TV에 가끔 나옵니다.”
노 선생이 또 농담을 했다.
  “하하...참...선생도...”
  “저는 이만 들어가서 자겠습니다. 여보, 건넌방에 이부자리 펴놓았으니 손님들 그리 모시세요.”
  “그리하리다. 잘 자요. 여보.”
  “안녕히 주무십시오.”
반백의 낚시꾼이 일어서서 깍듯이 아내에게 인사를 했다.
노 선생은 좋겠다...저런 동지가 있으니...

노 선생과 우린 경제,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문 선생은 전통의학에 관심이 많다며 팔체질침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나는 부산에서 판사생활을 하다가 민중의술의 전도사가 된 황종국 판사 이야기를 해드렸다.
노 선생은 우리 민족이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내칠 것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고 말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운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 제도를 개혁하려하면  기득권층이 반대하고, 기업을 위한 제도를 개선하려하면 노조가 깃발을 듭니다. 이기주의가 도를 넘어 사회의 구성원임을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전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갖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다양함이 건강한 구조의 국가를 만드는데...이런 식으로 가면 로봇같이 똑같은 사람들이 양산되고, 그들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사회에서 받는 대우도 점점 작아질 거고요.”
정말 그렇게 사회가 변하고 있었다.
모두 일류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공부만 한다.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영택이는 과거사를 완벽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사회정의가 바로 설 수 있다며 식민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우리 역사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냈다.
  “우리 역사를 바로 정리하는 일도 시급한데, 학자들의 손이 느리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자들이 학교 일에 매어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모든 게 다 돈 문제로 귀결되네요. 연구를 하려고 해도 돈, 사람을 키우려고 해도 돈...”
  “청초 선생님처럼 우리 의술을 위해 애쓰는 분들께 배려를 해드려야 하는데...”
  “하하...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아까 제 맥을 짚어보셨는데, 제가 오래 살 것 같습니까?”
  “하하...노 선생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단지 성격이 급하셔서 손해를 많이 보실 것 같습니다.”
  “제가 좀 그렇지요...잘 못 참습니다.”
  “화나는 일이 생기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일단 화를 밑으로 내리세요. 그러고 나서 한 박자 늦게 말씀하시면 편한 대화를 이끄실 수 있을 겁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 쓰는데 잘 안됩니다.”
  “타고난 성격이 워낙 강해서 그러시겠지요. 천천히 바꿔보십시오.”
  “밖에 나가서 단체로 담배 한 대씩 태우시지요.”
골초인 영주 뒤를 따라 모두 마당으로 나갔다.
노 선생은 마루 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어제 막걸리를 많이 한 탓에 늦잠을 잤다.
마루로 나가니 영주가 마당에서 붕어를 손질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아직 주무시나?”
  “새벽에 가셨어요.”
  “인사도 못 드렸는데...그리 일찍 가셨어?”
  “오늘 현재에서 발표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TV를 켰다.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오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선생님! 이겼네요.”
영주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가득했다.
나는 눈을 감고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의 앞길을 지켜주시옵소서. 그의 손길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닿게 하시고 그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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