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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Writing

박완서 수필집 - 보통으로 산다 - 중에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by Gomuband 2017.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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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남의 집에 방문하면 으레 거실이나 응접실로 안내를 받게 되지요.

처가에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거실의 소파에 앉게 되었는데,

다른 것보다 소파 옆의 커다란 책꽂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책꽂이의 책들을 죽 살피다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위 사진의 수필집이었습니다.

박 완서씨의 소설은 잘 알려져서 거의 다 읽어봤지만,

수필은 처음 대하는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빌려와서 읽었는데,

아직도 제 책꽂이에 있는 걸 보니 제가 이 수필집을 아주 좋아하나 봅니다. 

 

  

작가 박 완서 : 사진 출처 : https://namu.wiki/w/%EB%B0%95%EC%99%84%EC%84%9C


  박 완서씨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유학을 오게 된 계기와 맹모삼천에 비길만한 어머니의 교육열에 대한 일화는

박 완서씨의 자전적 소설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1970년 '여성 동아'에 장편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여,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등

현실 감각이 높은 작품을 발표했고, '살아있는 날의 소망', '남자와 여자가 있는 풍경' 등의 수필집이 있습니다.

아쉽게도...2011년에 우리 곁을 떠나셔서 따뜻한 님의 글을 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산다'는 1986년 '학원사'에서 출판되었는데요.

1989년에 5판을 발행했으면 수필집으로는 꽤 성공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그때는 문고판으로 나온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책은 크게 다섯 꼭지로 나누어져 있고, 첫 꼭지의 둘 째 글에 오늘 제가 소개하려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실려있습니다.

다른 수필들도 참 좋아서 많은 분이 접해보셨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이 책이 절판된 것 같네요.



  수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 속 깊숙이 잠재한 환호(歡呼)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작가는 꾸민 미소를 띠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 커다랗게 소리를 지를 만큼 기쁜 일이 없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삶에서 '파인 플레이'가 귀해졌다는 말을 슬쩍 흘리고 에피소드로 들어갑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다가, 마라톤 경기 때문에 오랜 시간 멈춰선 버스에서 내린 작가는

선두로 달려오는 선수에게 맘껏 환호를 터뜨리려는 소망을 담고 구경꾼 틈에 서지만,

이미 선두는 골인 지점을 통과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맥이 빠진 작가와 짜증 난 차량들 앞에 저만치 나타난 후미 그룹의 마라토너,

작가 앞을 지나는 마라토너의 얼굴을 본 작가는 마라토너의 얼굴에서 커다란 감동을 하게 됩니다.

그를 응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작가가 차도로 내려서며 열렬한 박수와 환성을 보내자

다른 이들도 합세하여 꼴찌 주자까지 손바닥이 빨갛게 될 정도로 성원을 해줍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환호하고팠던 오랜 갈망을 풀고 난 작가는, 1등에게 보내는 박수보다

열심히 한 꼴찌에게 보낸 환호가 더 신나고 감동스러웠으며 희열이 동반된 것이었다고 글을 마칩니다.

 


  제가 이 수필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위 사진에서 노랗게 표시한 곳입니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것을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 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다른 이에게 투영된 나를 지탱하고자 하는 갈망......

우린 운동경기 말고도 여러 곳에서 이런 걸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고,

때론 이야기 속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끈질긴 노력으로 승리한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많은 분이 읽고 감동한 이야기지만, 이 글을 읽었을 때, 저는 저 자신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이 붉어짐을 느꼈습니다.

제가 어려운 소년 시절에 음악이라는 길을 택한 것, 기타 한 대를 쥐고 평생을 살아온 것은

모두 돈과 빽, 새치기가 통하지 않는 정당한 길을 가고자 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모두 비슷한 성공의 길로만 달려가는 요즈음,

우리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너무 인색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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